돌아다니다 보면,
통신용어를 외계어로 치부하고 쓰지 말자고 하는 운동이 있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극단적으로 이질적인 단어 또는 문장의 외곡에는 고개를 흔들지만 또한 그것은 '언어의 변화'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는 문화가 변화하면서 - 그것이 꼭 발전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 바뀌기 마련이고, 문화 자체도 사회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기 마련이다.
과거의(주로 화자가 교육 받은 시기) 또는 현제의 문화와 언어가 쓰기 좋다고 앞으로도 그것을 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언듯 말한 것처럼 그 변화가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계층의 벽이 생길 정도이며 그것이 실재로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할 정도라면 조금은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허나, 위에서 내가 말한 것은 약간 비현실 적이고 잘못되었다.
층을 만들 정도로 이질적인 것이 실제로 사회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능할까? 불가능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만만한 것도 아니고, 가능할 정도면 그 층 넘어에서는 그 문화/언어가 '옳은 것'이며 대중에게 뿌리를 내릴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자, 말이 뒤틀려가고 있는 분위기니깐 결론을 내려보자.
'그것이 내가/우리가/지금 쓰는 것과 다르다고하여 핍박하지 말자.
그것은 나의/우리의/앞으로 자손들의 변화와 발전을 꽤할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문화 쇄국을 하지말자.
때에 따라 발전이나 정체보다도 퇴보가 옳을 수 있다.
길을 잘못들은 사회는 후진을 해야하며 그것을 못할 경우 패망할 수 있다.
나와 다르다고 남을 핍박하지 말자.
다양함이야 말로 사회가 가지는 가장 강한 무기이다.
내가 아닌 존재는 내가 생각하는 것 처럼 바보스럽지 않다.
그도 생각하는 존재이고, 틀리면 수정할줄 아는 존재이다.'
모두가 같다면 모두는 필요하지 않다.
하나와 몇몇 예비용품을 남겨두고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시간과 물과 공기는 흐르는 것이다.
인천의 나사 풀린 산호...
|